전시 감상 과제도 할 겸 개막 소식 들었을 때부터 보고 싶던 전시가 있어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에 사전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능해서 전날 미리 사이트 통해서 사전 예약을 했다

당일에 하려고 보면 오전에 아주 일찍 하는 게 아니고서야 자리가 없고 현장예매도 있다고는 하지만 개장 시간에 맞춰 가도 몇 자리 없다고 함 전날에는 널널하다

제일 안쪽에 위치한 미디어랩 7전시관에서 진행하는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에서는 초기 애니메이션 거장들의 작품과 그 제작 과정 및 기법 등을 소개한다

예전부터 애니메이션에 관심 많았다 한때는 심화전공으로 택할까 고민도 했는데 그러기엔 여전히 모델링이 제일 즐거웠다 나중에 기회 되면 배우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있다

연속되는 이미지의 나열로 움직임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영상과 유사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좀 더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2D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3D 애니메이션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가령 구체 오브젝트 하나를 두고서도 프레임을 잡는 키와 키 사이의 간격, 키의 갯수와 거기에 주어지는 텐션의 변화로 무수히 많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 타이밍과 스페이싱이 달라지면 오브젝트가 가진 이야기도 달라진다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로테 라이니거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프랑스 감독인 미셸 오슬로의 〈밤의 이야기〉나 〈프린스 앤 프린세스〉로 익히 알려져있다

빛과 그림자로만 연출을 해야하는 한계 때문인지 실루엣 애니메이션에 사용되는 종이인형들은 단면 디테일이 엄청나다 나뭇가지의 갈라진 끝과 거기에 달린 제각각의 잎사귀부터 캐릭터의 옷에 달린 장신구까지 모두 섬세하게 컷팅 되어있다

로테 라이니거존 한 쪽에는 실루엣 애니메이션 기법을 체험할 수 있게 컴퓨터와 카메라가 연결된 작업용 책상이 설치 되어 있다


사실상 촬영은 빛이 나오는 라이팅 보드 위에 종이인형을 얹어 카메라로 찍는 것 뿐이라서 크게 손이 가지 않는다 문제는 종이인형을 일일이 움직이는 연출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종이인형의 완성도가 연출이나 디테일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 배경의 각 요소를 일일이 움직이고 종이인형의 관절을 프레임마다 손 봐야하는 것이 결국 스톱 모션과 마찬가지로 노가다를 요구한다

체험구역 옆에 트릭테이블도 설치가 되어 있었는데 이 트릭테이블이 흥미롭다 포토샵에서 레이어를 구분해 작업하듯이 겹겹이 설치한 유리판에 레이어 별로 요소를 분리해서 촬영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인데 배경과 인물, 소품 등의 요소를 따로 구분해서 움직일 수 있지만 카메라로 볼 때는 원근감이 삭제된 채 하나의 화면에 전부 담긴다

노먼 매클래런 작품은 제대로 찍은 게 없다 사진이 다 엉망진창

노먼 매클래런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까 새내기 때 애니메이션 수업에서 배웠었던 작품들이 주르륵 나온다 스톱 모션 공부하면서 〈이웃〉 감상했던 게 기억 난다 노먼 매클래런은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인 NFB의 창립멤버였으며 다양한 기법의 실험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대표적 실험 애니메이터이다 NFB에서 애니메이션 부서의 책임자로 활동하며 젊은 애니메이터 양성에도 힘을 썼다고 한다

노먼 매클래런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필름에 직접적인 연출을 내서 이미지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다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다이렉트 필름 기법, 필름의 젤라틴 층을 칼이나 송곳 같은 뾰족한 도구로 긁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스크래치 온 필름 기법 등이 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기법이다

 

〈찌르레기〉는 내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의 본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선과 원 두 가지 도형 요소로만 캐릭터의 움직임을 만든 애니메이션인데 애니메이션은 정말 그런 점이 흥미롭다 단순 도형 한 두 가지의 움직임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작고 여린 새가 발걸음을 내딛고 날개짓을 하고 친구를 만나 함께 지저귀고 ... 소리 없이 이미지만 보는데도 그런 게 다 전해진다

 

렌 라이는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필름에 직접적인 연출을 내서 이미지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적극 사용한다 필름을 칼이나 송곳 같은 뾰족한 도구로 긁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스크래치 온 필름 기법이 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기법이다

전시관 출구에 다이렉트 필름 기법을 체험할 수 있는 테이블이 설치되어있지만 혼자 덩그러니 앉아 만지작거리기 민망해서 사진만 찍음

렌 라이 작품 중 〈투살라바〉의 제작 비하인드도 전시되어 있었다 제작을 위한 드로잉과 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장면인데 렌 라이는 주로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 같다 특히 〈투살라바〉는 세포와 같이 생긴 도형의 형태 변형을 주로 표현한 애니메이션인데 다른 도형과의 융합 과정 등도 그려져 있어서 보고 있으면 현미경으로 세포 분열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은 가장 많이 감탄했던 카렐 제만의 작품들

일단 디지털 합성 기법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그런 뛰어난 완성도의 합성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지 정말 놀랍다 화면을 분할하여 가린 상태로 촬영하고 다음 촬영에서 가려진 부분에 들어갈 영상을 추가 촬영하여 합성하거나 여러 개의 레이어 컷을 따로 촬영해 덧붙이는 방식으로 아날로그 합성을 시도했다고 한다 손으로 직접 합성하는 기법을 썼는데 연결이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또 카렐 제만은 특수효과에도 뛰어났는데 투명한 수조 탱크에 유색 페인트를 떨어뜨려 핏빛 연기 구름이 퍼지는 것과 같은 특수효과를 창조했다 이러한 특수효과는 미리 촬영한 애니메이션 영상의 뒷편에 붙이는 방식으로 합성한다

평면적 풍경을 사용해서 원근감을 나타내는 이러한 방식도 재미있었다 로테 라이니거의 트릭테이블과 마찬가지로 포토샵의 레이어 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 정말 감탄하면서 봤다 전시관에서 본 모든 작품 통틀어서 가장 좋았던 카렐 제만의 〈영감〉이다

카렐 제만은 체코에서 태어났는데 이 체코의 특산물 중 하나가 유리라고 한다 〈영감〉은 유리 공예를 이용해 제작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인데 유리 오브젝트를 제작하고 움직여서 만든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섬세하고 완성도가 뛰어난데 딱 봐도 엄청난 노가다라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민들레 홀씨가 수면에 내려 앉으면서 물결이 피어오르던 장면의 그 자잘한 공기방울들 ... 감독이 유리 구슬을 하나하나 움직여 가면서 촬영한 거라고 생각하면 겨울왕국에서 눈발 흩날리고 파도 휘몰아치는 장면 나올 때마다 그래픽 아티스트들을 떠올리며 흘렸던 눈물과 같은 종류의 눈물이 다시 흐른다 ... 창작자의 노가다가 주는 아우라 같은 거

뒷부분에는 실사 영상과 합성된 장면도 나오는데 이 합성도 매우 자연스러웠고 아무튼 유리 재질 자체의 특성이 물의 이미지를 한껏 잘 살려줘서 영상이 전체적으로 아름다웠다 이 작품은 제 1회 칸 영화제 애니메이션 부분 수상작이기도 하다

오스카 피싱거는 추상 영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개인적으로 렌 라이의 작품은 조금 지루했는데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은 그거보다 더 재밌었다 음악이 덧씌워진 것들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오스카 피싱거는 필름에 사운드트랙 까는 방법이 개발되고 나서 유성 영화를 꾸준히 연구했다 그 결과물로 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연구〉와 같이 음악과 동기화된 형태의 애니메이션이다 마치 요즘의 리릭 비디오 같은 느낌이다 다만 피싱거의 작품은 음악 트랙을 먼저 깔고 작업하는 게 아닌데도 음악의 싱크에 완벽하게 맞춘 움직임을 보여준다

〈연구〉의 이미지들이 너무 경쾌하게 움직이는 탓에 제대로 사진은 못 찍었지만 ... 〈영감〉 다음으로 오랫동안 관람한 작품

여기는 시간 남아서 잠깐 들렀던 MMCA 소장품 하이라이트전

근데 자투리 시간에 잠깐 들어간 거라 큐레이션 의도도 파악 못했고 작품 설명도 제대로 못 훑었고 심지어 관람하는 방향 반대로 들어가는 바람에 뭐 제대로 본 게 없었다 단순히 느낌 좋았던 작품 몇 개만 찍어왔는데 나중에 다시 가서 제대로 봐야지 싶다

전시 다 보고 1층 테라로사에서 커피 마시고 파운드 케익도 먹었다 감상 정리하고 도록도 좀 더 읽어보고 했다

작년에 《더블비전: Diplopia》 관람한 이후로 전시를 좀 더 보러 다녀야지 다짐 했는데 막상 또 보고싶은 전시들은 다 광화문이나 혜화 근처에서 하다보니 시간 내서 보러 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과제 핑계로 간만에 전시 본 게 나쁘지 않았다 백수 되면 좀 더 자주 보러 올 수 있겠지 전시 끝나기 전에 꼭 한 번 더 와서 감상하고싶다

그리고 다음에는 두 회차를 예약할까 싶다 한 회차만 예약하니까 영상물 있는 전시 하나 보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두 회차 예약하면 하나를 보더라도 진득하게 볼 수 있을 듯 다른 전시도 좀 더 보고 나올 수 있을 거 같고

근데 다 좋은데 미디어랩 7전시관은 왜 영상 스크린을 그렇게 높게 설치하는 거임 〈영감〉 볼 때 십 분 넘게 목 처들고 있는다고 아파 뒤지는 줄 알았다 진심

 

경복궁 근처 처음 가본 거 같다 한산하고 좋았는데 피곤해서 금방 돌아오느라 오래 구경은 못했고

 

그리고 전시랑 전혀 상관없지만 기념품샵에서 굳이 충동구매한 필통과 노트예요 책상이랑 찰떡이고 아주 귀엽죠 예